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그녀는 풍경을 삼킨다 - 박완호
여만
2014. 6. 17. 06:00
그녀는 풍경을 삼킨다
박완호
여자의 테이블에 놓인 유리컵 속으로 오후 여섯 시의 사물들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햇살의 체위가 아래로 기울수록 노래지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 맥주거품, 조막손을 흔들어대며 키 작은 은행나무가 유리 속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가지에 앉아 있던 새의 울음이 노란 방울소리로 떠오른다. 그녀는, 여섯 시의 풍경이 담긴 잔을 들어 가만히 입술로 가져간다. 유리컵 속의 사물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려가고, 쏟아지기 직전에 다다른 풍경들이 송두리째 그녀에게로 옮아간다. 몰래 숨어 있던 내 표정까지 한순간에 지워지고 만다. 그녀는, 언제 저들을 다시 공중에 풀어 놓았을까? 그녀가 사물들을 다 삼킨 뒤에도 풍경의 바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시집『너무 많은 당신』(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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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안의 흔들림』『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아내의 문신』『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너무 많은 당신』. ‘서쪽’ 동인. 현재 풍생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