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물방울 꽃 - 이관묵
여만
2014. 1. 30. 12:00
물방울 꽃
이관묵
삭은 나뭇가지에 물방울 꽃 피었다
마치 마음 내쫓고, 단단히 걸어 잠근 캄캄한 내 몸에 등(燈)을 걸어 놓은 듯, 제 뜻대로 살지 못해 휘어진 뉘우침들, 끝내 붙들지 못하고 놓쳐버린 초록의 장식들, 마음 깎아내고 허공에 뚫은 길들, 오지에 망명해 들어와 귀 틀어막고 사는 겨울, 이를 환하게 비추는 물방울 꽃
물방울로 인해 환해지는 것들, 물방울로 인해 비로소 형체가 드러나는 무거운 머리통이며 억센 손목들, 어둠침침한 종교들, 오를 때마다 방향이 뒤바뀌던 층계들, 검은 입들, 죄다 내쫓았다 환하다
많은 이들이 나를 빌려다가 읽었다 저녁보다 들판이 더 많은 페이지에 도착하자 엉망진창인 마음에 밑줄을 쳤다 그게 싫어 나는 나를 덮어버렸다 그 후부터 쉽게 어두워지고 일찍이 공중을 만났고 온종일 구름만 써내려갔다 곁에 물방울 환하게 켜놓고서.
하늘을 잔뜩 칠해 놓은 하루, 자신에게 은둔해버린 길, 자신을 들이켜고 시들시들 사라진 길 환히 비춘다 어디에도 마음 묻히고 싶지 않다고, 무음(無音)이란 이런 것이라고.
—시집『시간의 사육』(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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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수몰지구』『변형의 바람』『저녁비를 만나거든』『가랑잎 경』『시간의 사육』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