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아름다움의 출생지 -이기철

여만 2013. 9. 16. 07:00

아름다움의 출생지

 

    이기철

 

 

그를 맞이하기 위해 하루는 아침에서 저녁으로 걸어간다

이 세상 언니이고 누이인 아름다움이여

초승달이 뜰 때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그대 오늘 저녁 식탁에는 씻은 쟁반을 한 번 더 씻어 놓아라

별빛 놀다 간 접시마저 냅킨으로 닦고

가장 친절한 음악 한 구절도 나중에 오라고 통기해 두어라

그가 수저를 들 때까진

고요 외의 어떤 발자국 소리도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

그가 우아와 정숙의 반찬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손수건 구기는 소리도 내지 마라

그가 고요의 식사를 마치면

청초와 정결로 쓰인 책을 읽어야 한다

추를 깔고 앉아 읽는 그의 책은 모든 형용사의 누이다

이 세상에 없던 말로, 아름다움이여, 라고 부른 첫 입술이여

나누어 주고 나누어 주어도 남는 미의 사전을 펴고

그가 밝음의 아우들을 데리고 휴식에 들 수 있도록

계단과 뜰에 빗자루질도 잊지 마라

내가 맞이한 기쁨은 모두 그로 인한 것이다

그는 유리창이 가장 두려워하는 투명이다

그는 내가 시로 쓸 수 있는 최후의 모국어다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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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영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 『청산행』, 『유리의 나날』, 『가장 따뜻한 책』『나무, 나의 모국어』 등 14권의 시집과 『손수건에 싼 편지』 등 3권의 에세이집. 그 외에도 『시학』, 『작가연구의 실천』,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 등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