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종의 힘 -안도현
파종의 힘
안 도 현
옥수수 서너 알을 땅에 묻었다
이놈들이 땅거죽을 뚫고 올라오나 안 올라오나 궁금해 하는 동안 자꾸 겨드랑이가 가려웠다
내 겨드랑이에 병이 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앓는 병은 밤하늘에 뿌려 놓은 의심처럼 많은 것이어서
나 혼자 앓는 병은 빗방울이 땅을 갉아먹을 때처럼 아까운 것이어서
나 혼자 앓는 병은 귓가에 여치소리를 달고 있는 옥수수수염을 미리 상상하는 것처럼 성급한 것이어서
여러 날이 지난 뒤 땅속에 숨어 있던 새가 연둣빛 부리를 내밀었다
이 뾰족한 부리들이
내 무릎을 쪼아 먹고 내 허리를 쪼아 먹고 내 눈썹을 쪼아 먹는 날이 언제일까 궁금해 하는 동안 내 머리카락은 수시로 서걱거렸다
밤기차가 옥수수 줄기 끝 수꽃을 타고 오르는 꿈을 꾸었다
내 상상은 피의 두더지들이 지나간 손등의 핏줄같이 푸르스름하여서
내 상상은 거처가 없고 처자식도 봉양할 부모도 없고 오로지 흔들리는 그림자만 있어서
내 상상은 죽도록 사랑할 애인도 없고 이별 따윈 더더욱 없고 옥수숫대의 종아리만 있어서
나는 누군가 나에게 흔들리는 옥수수 그림자를 경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간신히 이를 가지런히 내보이며 파종의 힘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집『북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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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그리운 여우』『바닷가 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북항』. 2012년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