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김상미

여만 2013. 6. 21. 07:00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김상미

 

 

 

변한다 모든 건 변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도 변하고 팀 버튼의 영화도 변하고

건장한 팔다리처럼 강직했던 내 의지도 변한다

아무리 연장자들이 삶은 변하지 않는다 소리쳐도

젊은이들은 언제나 불 주위로 몰려들고 활활 타는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원상복구라는 말은 이제 낡은 말이 되었다

그래도 늑대들과 노는 것, 아무리 외로워도 늑대들과 노는 것만은

아직도 꺼림칙하고 고통스러울 뿐

우연히 마주친 대선배의 냉랭하고 못마땅한 표정 안에 숨겨진 검은 의도쯤이야

꽃이 제일 슬플 땐 피지 못할 때라며

부드러운 가을바람처럼 무심으로 꽉 품어주면 그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변하듯 인격도 변한다

개념 없는 시가 개념 있는 시보다 더 잘 먹히고

짧은 시가 긴 시보다 더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네들의 자유

오답 속에 무참히 익사하는 게 어디 시뿐이던가

양치기 소년은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고 더 얄팍한 자들은

미리 봐둔 서정적 비상구를 통과해 제집에서 편안히 히트작들을 써대고 있잖은가

지겹도록 순수를 양심을 본분을 지켜도

내 인생의 안뜰에 쌓이는 건 타인의 쓰레기들

다른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게 훨씬 험난한 세상이다

어딜 가도 포식자들은 에너지 넘치는 순한 이들의 문고리를 끊임없이 탐하고

백 년이 지나고 천년이 흘러도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자들은

눈동자 없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볼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내 팔목을 쓰윽 그어 주렴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보고 싶다

그 붉은 피로 어제는 짧은 시를 쓰고

오늘은 긴 시를 쓰고

내일은 또 어떤 시를 쓸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뭐래도 내 소원은

‘얼마나 멋진 날인가’로 시작하는 시를 써보는 것

그리고 그 시를 들여다보기 위해 온몸을 숙이고

그 속으로 황홀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계간 《예술가》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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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잡히지 않는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