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첫 펭귄 - 문정영
여만
2012. 9. 23. 09:10
첫 펭귄
문정영
한 무리 펭귄들이 차디찬 바다 앞에서 머뭇거린다.
한 마리 펭귄이 뛰어든 다음 다른 펭귄들도 잇따라 그 뒤를 따른다.
첫 펭귄은 한 마리 뿐이다 .
누군가 등을 떠밀어 바다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남극에 첫 깃발을 꽂은 아문센처럼 21C를 걷는 발자국은 어디서든 첫 펭귄이다.
사랑을 내딛고 나면 거기가 처음이고, 이별은 내딛고 간 발자국 뒤따라가는 다른 첫 발자국이다.
아프다고 혼자 짓는 눈물도 그 아픈 발자국에서는 처음이다.
그래서 지나간 아픔보다 지금 아픔이 더 아프다.
꽃들도 필 때를 아는 첫 꽃봉오리를 따라 일제히 몸을 열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첫 사람도 있다.
—《시인+》2012년 여름호
-------------
문정영 /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낯선 금요일』『잉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