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황금 서랍 읽는 법 - 정영숙
여만
2012. 9. 6. 09:00
황금 서랍 읽는 법
정영숙
기린의 긴 목을 지닌 여인이
가슴에 황금빛 서랍을 열고 강가에 서 있다
열린 서랍 속에는 푸른 강물이 가득 흐르고
흰 물새 한 마리 강물을 차고 하늘로 오른다
그녀의 서랍 속 풍경은
그녀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있는 기억들
전생부터 돌고 있는 차륜의 바퀴살
내세에도 이어지는 소망의 강물이다
바람에 흔들려 고리의 연을 끊고 어둠 속에 잠기는 새는
빛나는 이슬을 보지 못하는 법
황금빛 빛나는 서랍 속에는
허깨비 같은 그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실체
그의 착각이 빚은 그녀의 몸뚱어리는
애초부터 없었다
뜨거운 심장의 박동 없이 오감으로만 느끼는
그의 직관은 어둠의 환영 속에 갇히고 만다
모태인 강물을 담고 있는 기린여인의 신비한 가슴을
그의 흐린 눈으로는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기린여인의 열린 가슴에는 여전히 꿈의 강물이 흐르고
그녀의 하얀 새가 물을 차고 하늘로 오르고 있다
—시집 『황금 서랍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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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 경북 대구 출생. 서울교육대학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로 작품 활동. 시집 『지상의 한 잎 사랑』『물속의 사원』『웅딘느의 집』『하늘새』『황금 서랍 읽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