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기호의 천국에서·2 - 이승하

여만 2012. 8. 8. 12:56

기호의 천국에서·2

     이승하




돌아서 가시오 돌아서 간다
이리로 가면 안 됩니다 그리로 가지 않는다
지구를 덮은 기호 기호들
바퀴벌레 같은 기호 바이러스 같은 기호
내 앞에 덜컹 나타나고
내 뒤에 죽어라 하고 따라붙는다
은총을 베풀고 복음을 전한다

기호는 나에게 설교한다 나는 믿는다
지상에는 어디에나 선지자의 목소리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는 하지 마시오
쇠로 만들어진 얼굴 위에
페인트로 분장하고 나선 기호 기호들
기호의 천국에서 나는
꿈을 버린다

이런 꿈을 꾸라고 명령하는
팻말들 표지판들 상업광고들
나는 늘 기호가 가리키는 대로
간다 마음놓고 가다가도
멈추라고 할 때는 반드시 멈춘다
돌아서 가시오 돌아가지 마시오
어딜 가시오? 당신 돌았소?

----------------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군에서 출생. 1984년 시 「畵家 뭉크와 함께」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9년 소설 「備忘錄」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사랑의 탐구』『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폭력과 광기의 나날』『박수를 찾아서』『생명에서 물건으로』『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시론집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소설집『길 위에서의 죽음』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