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순수시(純粹詩) - 오규원
우리 시대의 순수시(純粹詩)
오규원
1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光化門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文化史的으로 본다면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저것은 保守主義의 징그러운 미소인데
안녕한 벽, 안녕한 뜰, 안녕한 문짝
그것 말고도 안녕한 창문, 안녕한 창문 사이로 언뜻 보여주고 안녕한 性戱(성희).....
어째서 이토록 다들 안녕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냐
2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16세기나 17세기 또는 그런 세기에 내가 살았다면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을 것인가
淸進洞도, 그래 밤 사이 안녕하구나
안녕한 건 안녕하지만 아무래도 이 안녕은 냄새가 이상하고
나는 나의 옷이 무겁다 나는
나의 옷에 묻은 먼지까지 무게를 느낀다
점잖게 말하는 점잖은 사람의
입 속의 냄새와
아침마다 하는 양치질의 무게와 양치질한
치약의 양의 무게까지 무게를 느낀다
이 무게는 안녕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 무게는 안녕이 독점한 시간의 무게
미래가 이 世上에 있었다면 미래 또한
어느 친구가 독점했을 것을
이 무게는 미래가 이 世上에 없음을 말하는 무게
그러니까 이건 괜찮은 일 ?Ι?
어차피 이곳에 없으니 내가 또는
당신이 미래인들 모두 모순이 아니다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保守主義란
현상을 그대로 보전하여 지키려는 主義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아침의 무덤이 무슨 말 속에 누워 있는지
말이 되는 안 되는 노래가 되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은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는
말의 옷을 벗기는 일
벗긴 옷까지 다시 벗기는 일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敗北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敗北를
敗北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
3
어둠 속에 오래 사니 어둠이 어둠으로 어둠을 밝히네. 바보, 그게 아침인 줄 모르고. 바보, 그게 저녁인 줄 모르고.
진리는 진리에게 보내고
믿음은 믿음에게 안녕은
안녕에게 보내고 내가 여기 서 있다
약속이라든지 또는 기다림이라든지 하는 그런 이름으로
여기 이곳의 주민인 우편함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비어서 안이 가득하다
보내준다고 약속한 사람의 약속은
오랫동안, 단지 오랫동안 기다림의 이름으로 그곳에 가득하고
보내고 안 보내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남은 것은 우편함 또는 기다림과 나의 기다림
또는 기다리지 않음의 자유
거리에는 바람이 바람을 떠나 불고
자세히 보면 나를 떠난 나도 그곳에 서 있다
유럽의 純粹詩란 생각건대 말라르메나
발레리라기보다 프랑스의 행복 手帖
말라르메는 말라르메에게 보내고 나는 淸進洞에 서서
발레리는 발레리에게 보내고
나는 淸進洞에 서서
우리나라에게 純粹詩, 純粹詩하고
환장하는 이 시대의 한 거리에 내가 서서
4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오는 도중에 오기를 포기한 비도
비의 이름으로 함께 온다.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淸進洞도, 淸進洞의 해장국집도 안녕하고
서울도 안녕하다.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그리워했던 안녕의 영원히 안녕을 그리워할 안녕과, 그리고 다시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다시 그리워할 안녕이 가득찬 거리는 안녕 대문에 붐빈다. 그렇지, 나도 인사를 해야지. 안녕이여, 안녕
保守主義여 현상유지주의여. 밤 사이 안녕, 안녕.
여관에서 자고 해장국집 의자에 기대앉아
이제 막 아침을 끝낸
이 노골적으로 안녕한 안녕의 무게가
비가 오니 비를 떠나 모두 저희들끼리 젖는데
나는 나와 함게 아니 젖고
안녕의 무게와 함께 젖는구나.
그래, 인사를 하자. 안녕이여
안녕, 빌어먹을 보수주의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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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 1941년 경남 삼랑진 출생. 동아대졸. 196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분명한 사건』『순례』『사랑의 기교』『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등. 시론집 『현실과 극기』『언어와 삶』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수상. 2007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