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디아스포라 - 이문재

여만 2012. 8. 24. 09:00


디아스포라 

         이문재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보았다.
미국에 정착한 르완다 난민 출신 여대생이
토크쇼가 끝날 무렵 말했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한 사람은 바꿀 수 있다고,
카메라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아직도 서울에 정착하지 못했으니
나 역시 난민이었다.
나는 내국 디아스포라였다.

서울에서 서울에 정착하지 못한 나는
종이 위에 쓴다.
한 사람을 바꿀 수 없어서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아니, 나는 나를 바꿀 수 없어서
한 사람을 바꾸지 못했다고,
그래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하얀 종이 위에 또박또박 쓴다.

또박또박 쓴 종이를 구기며 다시 말한다.
나는 한국에 정착하고 싶었다라고,
나는 오직 나에게 정착하고 싶었다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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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제국호텔』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