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봄비가 차마, 귀(耳)가 되어 내리는 - 박연준

여만 2012. 5. 8. 09:00

봄비가 차마, 귀(耳)가 되어 내리는

 

               박연준

 

 

깨금발로 가벼이 내리는 봄비

뒤척이던 봄의 땀방울일까

아홉 개의 귀를 삼킨 흐르는 봄아

 

등걸잠 자던 옛 애인은

벚꽃 아래 숨어서 늙지도 않고

파랑이 됐다가, 수의(壽衣)가 됐다가

입김이 됐다가, 봄이 되어 내리나

쇳물처럼 붉게

녹을 품고 내리나

 

당신─이라는 테두리에 스민 철없는 마음

들릴까, 어쩌면 들릴 수도 있을까

속절없이 눈감은 숨은 별들아

 

바스러진 봄 귀(耳)가 하나, 둘, 우수수

꽃잎처럼 사뿐히 떨어지면은

내리나 당신, 붉게 흘러내리나

 

봄 그림자 넓게 지나가는 밤

모르고 활짝 핀

밤의 귀들아

눈 감고 실컷 뛰어다니렴

 

        —《문장웹진》201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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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