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그들만의 요란법석 - 진란
여만
2012. 4. 21. 09:00
그들만의 요란법석
진 란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애인에게 한꺼번에 전화를 거는 사람
달이 떴다고 전화를 걸고
눈이 온다고 문자를 보내고
비가 온다고 온통 쓸쓸해하는
모든 세상의 길은 애인들의 전화선이다
한때, 서로에게 환한 등이었을 수다스러운 행각도
한때, 오직 한 곳만을 응시했을 뜨겁던 시선도
바람이 불고
풍경이 흐려지고
사람도 낡아지는데
보이지 않는 선을 걸어가는 모퉁이쯤에서는
어젯밤 쓸쓸한 가슴에 품었다 걸어놓은 너의 눈썹달이었고
새벽에 홀로 서 반대편의 반쪽을 생각하다 미처 지우지 못한 낮달이었고
다시는 붙일 수 없는 사금파리처럼 깨어진 조각달이었고
그대는 세상의 모든 전화벨이 한꺼번에 쏟아지라고
길을 열어놓은 사람, 부재중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절했을 수도 있었을,
스팸으로 등록되었을 수도 있었을,
여전히 바람은 불고
달이 뜨고
벨은 울린다
—《문학마당》2012년 봄호
----------------
진란 / 전북 전주 출생. 2002년 《주변인과 詩》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혼자 노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