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밤, 속옷가게 앞에서(외 1편) - 김경미

여만 2012. 3. 20. 10:00

밤, 속옷가게 앞에서 


                     김경미


마음의 길들이 다 아프다 덜어내고 싶은 마음 흐려지는 시야……

세상에서 상처받은 날이면
밤의 정류장 속옷가게 앞에 서서
내의만 입고 선 마네킹들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그들 몸 속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나비빛들,
유리 건너 눈부시게 날아들 때마다
견뎌다오 나여, 한 번만 견뎌다오.
무엇이 그리 대단히 슬프고 아플 것인가
혹은 짐작지 못한 고통도
혹은 있지 않았으면 싶은 어둠도
몸빛을 돋우려는 저 검정 슬립 같은 것
그 가슴 한가운데에 놓이는 작은 꽃 장식 같은 것
밖은 아무래도 괜찮다
몸 속 거기, 아름다운 것들 거기 다 모여
불빛 켜들고 몸 밖까지 나가는 나비색 불빛 켜들고
가슴 안에 다, 거기, 모여 있으면
무엇인들 아플 것인가
밤 속옷가게 앞에서 문득 눈물 고이니

그렇게 세상을 또 한 번 건너가라고
신호등도 비로소 푸른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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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비망록」 당선. '시힘' 동인.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쉬잇, 나의 세컨드는』

(김경미 시인의 시가 하도 좋아서... 보너스로...)

 

마음 기울다가



 

바람둥이처럼 흰눈 쏟아지는 날
바람둥이라고 소문난 남자와 일 때문에 차를 마신다
소문 달리 그 삼십대는 언뜻언뜻 수줍음 드러나고
흰눈에 덮인 지붕 색깔이나 뾰족한 돌부리처럼
속으면 안 된다고
끌려가지 않으려 뒷발 안간힘으로 뻗대는 고양이처럼
일에만 몰두하려 하는데
창밖의 눈 때문에 일에는 마음이 안 간다며 그는 웃고
어린 시절 담배 불량스럽게 피워 문 동네오빠한테 끌리듯
내 마음도 자꾸 진척이 되어가면서

바다 위 한쪽 바닥 뚫린 배처럼 위험하게 기울고
기둥 하나 삭아가는 집채처럼 불안하게 기울다가

창밖의 눈 바람둥이처럼 어느덧 그쳐버리고
그새 사랑과 이별을 다 끝낸 두 남녀는
또 흰눈 같은 즐거운 쓸쓸함 하나를
받침목 줄 세워놓은
마음 헛간에 나눠 담고 총총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