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여만 2011. 12. 16. 10:00

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리고 만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핥고도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가 속맘으로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소리 내어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2001)

 -----------------

이면우 / 1951년 대전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저 석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 내가 육십이 되었을 때는? 이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