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거미와 이슬 -오봉옥
여만
2011. 12. 15. 10:00
거미와 이슬
오봉옥
거미의 적은 이슬이다
끈끈이 점액질로 이루어진 집은
이슬의 발바닥이 닿는 순간
스르륵 녹기 시작한다
눅눅해진 거미줄로는
그 무엇도 붙들 수 없어
허공을 베어 먹어야만 한다
거미는 숙명적으로
곡마단의 곡예사가 된다
가느다란 줄에 떼지어 매달리는 이슬을
곡예사가 아니고선
다 털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의 살은 공처럼 부드럽다
곡예사는 이슬을 발가락 끝으로 통
통 퉁겨보기도 하고
입으로 빨아들여 농구공처럼 톡
톡 내쏘기도 한다
작은 물방울들을 눈덩이처럼 굴려
크게 만들어놓은 뒤
새총을 쏘듯이 거미줄을 당겼다 놓아
다시금 새하얀 구슬들로 쏟아지게도 한다
이슬을 다 걷은 거미는
괜시리 한번 거미줄을 튕겨본다
오늘도 바람이 불면 그물망 한 가닥
기둥처럼 붙잡고 흔들릴 것이다
그뿐인가,
팽팽한 줄이 퍼덕이는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할 것이다
— 시집 『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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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 1961년 광주 출생. 1985년 창작과비평사 『16인 신작시집』에 「내 울타리 안에서」외 7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지리산 갈대꽃』『붉은 산 검은 피』『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노랑』.『겨레말큰사전』남측 편찬위원.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