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는 -박완호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는
박완호
송사리가 뛰어올랐다 내려앉은
수면이 파르르 떨린다, 소심한
물낯을 흔드는 것은 물고기를 놓친
허공의 자책, 처음 온 곳으로 햇빛을 되돌려 보내는
비늘의 매끄러운 살결에 정신을 놓아버린
바람의 한숨, 조그만 동심원을 그리며
가라앉는 작은 물고기가 사실은
허공의 전부이고 바람의 온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 고요하던 수면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은
너와 나, 너의 순간이 나의 순간 위에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얹었기 때문, 잔잔한
물의 낯에 한 겹 한 겹 지문을 새기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
—시집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커브처럼,
그냥 변화구를 던져 줘, 라는 말보다
내게 커브를, 이란 말이
훨씬 매력적이란 걸
곧장 당신에게 달려왔어요, 라고
바로 들이대는 것보다는
어딜 좀 들러 오느라……, 하는
머뭇거리는 얼굴이
내 맘 더 깊이 파고든다는 걸
커브, 하고 말할 때면
어딘가 살짝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빙빙 도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지쳐
잠시 쪼그리고 앉아 쉬는
네 흔들리는 숨결들
커, 커브라고,
내게 커브를 던져 줘, 라고 말할 때
네 혀 끝에 걸려 있던 바람이
어느 순간 나를 향해 밀려오듯
그렇게 내게로 와 줘,
어디로 꺾일지 모르는
마음의 둥근 궤적을 따라
커브로, 커브처럼, 그렇게,
—시집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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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안의 흔들림』『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아내의 문신』『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현재 풍생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