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겨울 호숫가에서 -장석남
여만
2011. 9. 26. 09:00
겨울 호숫가에서
장석남
언 호수에 눈 내려 흰 광장인데
누군가 가로질러 걸어간 발자국 있습니다
나는 덜컹 내려앉는 가슴으로 바라봅니다
멀어질수록 수심(水深)은 깊겠고
저 발자국 주인도 두려웠을 겁니다
깊어지는 두려움
깊어지는 두려움
혹 가다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
새는 제 발자국 거둬 날아오르지만
제 발걸음 속으로 꺼져 들어가지는 않았겠지
깨우침이 아니라면
깨우침이 아니라면
무사히 건너편에 닿았을까?
돌아온 자국은 없습니다
왜 저 두려움 위를 걸어갔을까?
위안처럼 발자국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두려움 위를 걸어가 본 심정을
나는 한 두어 뼘쯤 알기에
펄럭이듯 바람 속을
얼마쯤 더 걷습니다
호수 건너편 쪽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또다시 눈이 옵니다
발자국은 곧 깊이깊이 가라앉을 겁니다
발자국끼리만 다정히 가라앉을 겁니다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겁니다
심연으로 심연으로 걸어갈 겁니다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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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1965년 경기도 덕적 출생. 1987년 〈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뺨에 서쪽을 빛내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