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구름 위의 발자국 - 신현락

여만 2012. 9. 17. 09:00

구름 위의 발자국

 

      신현락

 

 

 

나비는 꽃잎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새는 죽어서 구름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아무도 꽃잎의 발자국을 보지 못한다

꽃잎이 지고 나비의 날개는 비에 젖는다

나비를 비애의 그림자라고 명명하는 건

당신의 몫이겠으나 여기부터는 구름의 영역이다

당신은 꽃잎을 밟으며 꽃잠에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구름의 문장을 해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름이 하늘색을 지우는 건 잠깐이다

한때 나는 구름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쳤으나

새들만이 그 너머로 날아갔음을 안다

꽃잎 위에 비 내리고 어제가 오늘이 되었다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나는 죽은 새를 들고

구름 위의 발자국을 맞히는 신궁을 기다린다

 

       —시집『히말라야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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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히말라야 독수리』, 논저 『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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