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눈 - 김기택

여만 2012. 8. 13. 09:00



       김기택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는다.
어둠.
핏줄이 뻗어 있는 붉은 벽.
느릿느릿 무늬가 움직이는 물렁물렁한 벽.
눈꺼풀이 닫혔는데도
눈은 계속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나는 피곤해서 잠깐 쉬려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은데
어둠이건 흐릿한 것이건
눈은 닥치는 대로 초점을 맞추려 한다.
때마침 달갑지 않은 기억이
오래된 그림을 들고 눈앞으로 끼어들려 한다.
어젯밤 자는 동안에도
눈이 끊임없이 꿈을 쳐다보고 있는 통에
자고나서도 머리가 무거웠다.
눈 감으면
모든 것은 일시에 어둠이 되지만
그 어둠 속엔
어둠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은
닫힌 눈꺼풀 속에서도 계속 눈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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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 당선.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