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나는 방/시집 속에서 꺼낸 詩

옛날 우표 -이대흠

여만 2011. 11. 19. 11:00

옛날 우표

               이대흠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 보낼 때

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

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

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

어떤 본드나 풀보다도

서로를 단단히 묶을 수 있었던 시절

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

순이 되고 싹이 되고

이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

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

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

그대 혀가 내게로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

이따금은 배부른 말 떼가 언덕을 오르곤 하였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람이 혀로 들고

세상에서 가장 순한 귀들이 풀로 듣던 시절

 

그런 옛날이 내게도 있었지

 

     —《딩아돌하》 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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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1968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예대, 조선대 문창과 졸업.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힘’ 동인. 시집 『물 속의 불』『상처가 나를 살린다』『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귀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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