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표
이대흠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 보낼 때
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
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
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
어떤 본드나 풀보다도
서로를 단단히 묶을 수 있었던 시절
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
순이 되고 싹이 되고
이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
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
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
그대 혀가 내게로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
이따금은 배부른 말 떼가 언덕을 오르곤 하였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람이 혀로 들고
세상에서 가장 순한 귀들이 풀로 듣던 시절
그런 옛날이 내게도 있었지
—《딩아돌하》 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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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1968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예대, 조선대 문창과 졸업.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힘’ 동인. 시집 『물 속의 불』『상처가 나를 살린다』『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귀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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